첼리 비사와삼(인도)

저는 인도의 전통적인 힌두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진학할 고등학교를 정해야 했는데, 아버지께서 힌두교 기숙학교를 보내기 위해 찾아보셨지만, 갈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기독교 기숙학교를 가야만 했는데, 아버지께서 거기를 가더라도 성경을 절대로 읽지 말고, 기독교에 대해서 아예 생각하지도 말아라. 그냥 공부만 해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다행히 학교에 입학해서 힌두교를 믿는 선생님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도 저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 분이셨기에, 아침저녁으로 힌두 신에게 예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여름방학이 되었습니다. 저는 집으로 갔고, 선생님은 개인 사정으로 학교에 남아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변화

방학 동안 기드온협회에서 학교를 방문했고, 기드온회원들이 기드온성경을 나눠주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방을 쓰는 선생님에게도 기드온성경을 전해주면서 복음을 소개해 주었고, 선생님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제가 학교로 돌아와 제 방에 들어섰을 때, 선생님도, 벽에 붙어 있던 것들도 달라졌습니다. 선생님의 얼굴을 봤더니, 아주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라고 묻자, 선생님께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어!”라고 말씀해 주셨고, 저는 안돼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다시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했습니까?” 물었더니, 선생님은 기드온성경을 들면서 요한복음 316절을 펼쳐 읽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선생님, 알겠어요. 이 작은 책에서 말하는 신을 믿게 되셨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실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읽어주셨던 부분이 계속 귓가에 맴도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잠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렇게 일요일 아침이 되었는데, 선생님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그리고는 교회에 가셨습니다.

 

예수는 어떻게 생겨먹은 신인가?

어느 일요일 선생님께서 제게 첼리, 나와 교회 가지 안을래?”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격한 거부감을 드러냈습니다. “선생님 미치셨어요? 저는 교회 가지 않을 거에요!” 그리 반응했지만, 제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선생님이 모든 것을 버려 가면서 예수를 믿게 하였는가? 가족, 종교, 힌두의 신들... 그럼 한번 가서 확인해볼까? 예수는 어떻게 생겨먹었는가?’ 그래서 다시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같이 가요.” 그러자 선생님께서 즉시 그래, 가자!” 하셔서, 같이 걸어서 1.6km가 떨어진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상상한 교회는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꾸며진 건물이었지만, 도착해보니 멋진 건물이라고 마땅히 할 것 없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교회에 들어섰을 때, 목사님이 저를 보시며, “! 이 학생이 그동안 우리가 기도해오던 그 학생이군요!”라며 맞아주었습니다.

교회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교회 왼쪽 벽에 한 그림을 보았는데, 벌거벗은 남자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며 죽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예수님이 어떤 모습인지, 십자가가 어떤 형상인지 몰랐습니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저는 아주 슬펐지만, 놀랐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왜 저런 흉한 그림이 교회 벽에 걸려있는 건가요?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려 죽은 모습을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미소를 지으며, “첼리, 저 그림이 이 교회에 있는 유일한 그림이야. 그리고 예수님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너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셨어. 예수님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구원에 관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저는 그동안 수많은 신과 여신들을 믿어 왔습니다. 그중에 어떤 신도 나를 위해서 죽은 신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신들에게 많은 헌신을 드렸지만, 어떤 것도 보상받지 못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결국 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교회에서 돌아오고 나서, 제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사실을 가족이 알게 됐을 때 가족들이 저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했기에 무서워 떨었습니다.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집을 떠나 성경대학으로

그다음 여름방학에 집에 돌아가야 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주신 기드온성경을 가지고 갔습니다. 저희 집안은 독실한 힌두교 집안이었습니다. 집에는 특별히 매일 아침저녁으로 힌두신들을 예배하기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도착하자마자 신에게 예배할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방에 들어서기 전, ‘오늘이 부모님께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고백해야 하는 날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예배 준비를 마쳤을 때, 저는 어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저는 저 방에 이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저 우상에게 더이상 예배드릴 수 없어요.” 저의 어머니께서는 제가 농담한다고 생각하셔서, 웃으며 다시 물으셨습니다. “지금 너 뭐라고 했니?” 저는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저 방에 들어갈 수 없어요. 저는 이제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에요. 저는 예수님을 영접했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종교에 대해 엄격하신 분이었기에, “내가 많은 벌을 받게 됐구나!” 한탄하시며 아주 화를 많이 내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집으로 돌아오셨을 때, 이 사실을 아시고는 저에게 학교로 돌아가지 말고 집 밖 어디도 나가지 말아라. 기독교인이 되었으니, 집에만 있어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 빌었습니다. “성경도 안 읽고, 교회도 가지 않을 테니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마치게 해주세요.”라고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아버지께서 학교로 돌아가는 것은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부드럽고 단호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공부만 해라!”

저는 학교에 돌아와서 과정을 마칠 수 있었지만, 집에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집에서 650km 떨어진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으로, 기독교인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결정하고 떠났습니다.

 

아버지가 모르는 사실 한 가지

석 달 뒤, 아버지께서 저의 대학으로 찾아오셔서 저에게
너는 더이상 이 학교에 다닐 수 없다. 당장 짐 싸라! 기독교에 관련된 모든 것들은 버려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대학에 입학한 지 3개월 만에 슬픈 마음으로 짐을 싸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모르시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기드온성경은 작아서 어디든지 숨길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기드온성경 한 권을 옷들 사이에 숨겨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고향에는 교회도 없었고, 제겐 설교를 들을 수 있는 라디오도 없었습니다. 집에서의 생활은 감옥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는 제가 기독교에 대한 모든 것을 잊게 하려고, 독실한 힌두교 집안의 남자와 결혼시키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힌두신에게 예배하며, 제사 음식을 가지고 왔지만, 오히려 제가 금식기도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기드온성경을 침대 매트리스 속에 숨겨놓고 매일 밤마다 욕실로 들어가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던 사건에 대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그들이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을 때, 감옥의 문이 열렸고, 그들을 묶고 있던 사슬들이 끊어졌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이 사건이 우리 집에서도 일어날 것을 믿었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

독실한 힌두교 집안의 남자가 결혼을 위해서 결혼식 21일 전에 저희 집에 왔을 때, 부모님은 계속 독촉하셨고, 그 남자는 저희 집 근처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께서 저를 건져내실 것을 알았습니다. 21일 동안 아버지는 계속 저를 채근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께서 제 방에 들어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쁜 소식이 있다.” 저는 아버지께서 저를 독촉하시기 위해서 들어오셨다고 생각하고,
아버지 저를 내버려 두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아니다. 꼭 할 말이 있다. 너와 결혼하기로 한 청년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 이후로 저는 제가 다니던 대학으로 돌아와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후 43년 동안 2명의 아름다운 자녀들을 허락하셨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많은 실패를 경험했지만, 저에 대한 주님의 계획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이 간증을 통해서 모든 기드온회원, 세계 각국의 기드온협회를 격려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곳으로 인도하시든지,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 선 그날, 각 사람에게 이런 질문이 주어질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였느냐?” 분명히 기드온회원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인도에 중국에 러시아에 아프리카에 세계 곳곳에 기드온성경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렇게 답하실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다.” 하나님께서 기드온 회원과 부인회원들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한국국제기드온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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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드온 생존기

간증 2023. 10. 19. 10:58

저는 1990526일 제 아내와 함께 한국 국제기드온협회 회원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장로로 임직을 받은 1989년 다음 해인 1990년에 입회할 때 제 나이 만 45, 제 아내는 30대의 아주 젊은 때였습니다.

그 당시 수원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저희 교회 선배 장로님의 입회 권유가 있었는데 갓 장로가 된 자가 거절할 수 없어 응락을 했습니다. 입회 이후 저는 사업 일로 바쁘다는 핑계로 주간기도회는 전혀 참석하지 않았고 월례회만 마지못해 참석하는 비활동 기드온 회원으로 지냈습니다.

 

수원캠프 성경창고 지킴이

그러던 중 어느 월례회 안건을 토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비교적 젊고 열성이 대단한 분이 성서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성경책 보관상의 문제점을 얘기했습니다. 수원 시내 유신고등학교 운동장, 한 모퉁이에 있는 콘테이너 박스에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기에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자동차로 운행하기도 힘들고 박스 안의 습기로 보관 중인 성경을 많이 버리게 되어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쉽지 않다는 얘기였습니다. 마침 용인 민속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 사업장에 버섯을 기르던 재배사 빈방이 있었습니다. 60cm간격의 층으로 5단 선반으로 된 구조이며 환기가 잘 되게 설계된 방이었습니다. 경청하고 있다가 제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빈방 구조를 설명하고 수원에서 좀 떨어져 있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성경 창고로 제공하겠다고 제안하였고 흔쾌히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때부터 몇 년 동안 제가 수원 지역 성경창고 지킴이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1998820일 캠프총회에서 성경창고 지킴이가 성서부장을 맡는 것이 마땅하다 하여 그로부터 3회기 동안 성서부장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기드온사역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서부장을 얼떨결에 맡았는데 눈을 들어보니 주간기도회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간기도회에 안 나갈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이후 지금까지 주간기도회를 빠진 적이 거의 없습니다. 주간기도회 없이는 기드온사역이 시작될 수 없고 또 감당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저는 계속 아웃사이더로 머물다가 어느 날 떨어져 나가고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매년 초 헌금액을 약정하고 실천

이렇게 꾸준히 기드온사역에 임하고 있던 중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만나게 되어 캠프에서 교회순방사역이 제한을 많이 받게 되면서 사역이 많이 위축되는 것을 목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에게 한 가지 생각이 강하게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기드온협회 국제대표가 한 메시지 중 한국 기드온들은 자신의 지갑을 더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우리들의 지갑을 좀 더 크게 여는 실행을 촉구하였고,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전국교육위원으로 신앙기금 프로그램을 강의하면서 신앙기금 모금 활성화를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권면하지만 제 자신이 그동안 적극적으로 실행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주저하며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갈라디아서 6 : 2절 말씀과 고린도후서 8, 9장에서 사도 바울 연보를 하나의 주제로 다루는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우리들의 헌금은 그 목적이 분명하며 그 헌금이 남의 짐을 대신 져 주는 것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이루는 것이고 헌금 방법은 매 회기 초에 회기 동안 할 헌금 금액을 약정하고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특히 기념성서헌금은 우리가 기드온사역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은혜에 넘치는 감사함으로 헌금할 때 늘 찾아하는 헌금이며 기드온사역의 마중물이라 생각하고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후 제가 교육위원으로 교육에 임하는 태도에도 많은 변화가 온 것을 저 스스로 실감합니다. 이 또한 제가 만난 큰 사건이었고 이렇게 때를 따라 만난 여러 사건으로 말미암아 제가 아직 기드온사역의 일꾼으로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되었고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은혜대로 된 일임을 믿으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한국 국제기드온협회 한용식 회원

Posted by 한국국제기드온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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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예은교회 김은주 사모

 

그래도 종교는 기독교

저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교회가 어떤 곳인지, 누구를 믿는 곳인지 알려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릴 적에 기억하는 교회는 가끔 맛있는 간식을 무료로 나눠주는 곳이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았어도 성탄절에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가서 간식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교회에서 나누어 주신 맛있는 간식을 먹었던 고마움에 대한 기억으로 학교에서 조사하는 종교가 무엇이냐는 질문란에는 항상 기독교라고 적었습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싶은 소망

대구에서 국민학교 5학년 때에 광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사촌언니들이 다니는 교회를 소개 받아 광주중앙교회에 등록하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신앙에 대한 지식이 백지와 같은 아이였기 때문에 강단에서 말씀하시는 목사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반 선생님의 말씀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이 즐거워졌습니다. 매주 열심히 결석하지 않고 나갔습니다. 몇 개월 다니다 보니 아이들이 가지고 다니는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성경책이었습니다. 가지고 싶은 마음이 커져 갔지만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어느날 교회학교 선생님이 전도한 친구들에게 성경책을 선물로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책을 가지고 싶어서 친구들을 전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빨리 가지고 싶은 마음에 남동생을 교회에 데리고 가기 위해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동생을 데리고 교회에 갔습니다. ‘다음 주엔 나에게도 성경책이 생기는 구나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한 주, 두 주, 한 달이 지나도 성경책은 제 손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기대한 만큼 실망스러운 마음도 컸습니다.

 

드디어 내 손에도 성경이!

이런 저의 상황과 환경 가운데에 놀랍게도 저는 중학교를 수피아 여중으로 배정받았습니다. 그 당시 수피아 여중은 여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학교는 아니었습니다. 수피아 여중은 배유지(Dr. Eugene Bell) 선교사님이 1908년에 설립한 기독교 학교입니다. 같은 반에서도 몇 명 배정받지 못했는데, 제가 그중 한 명이 된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제가 수피아 여중에 입학할 때엔 성경책을 교과서로 사용했기 때문에 신입생들이 꼭 구입해서 가져가야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서점에 가서 성경책과 찬송가를 드디어 사게 되었습니다. 세로로 오른쪽부터 읽어나가는 성경책이었습니다. 교회에 가지고 다닐 성경책과 찬송가가 저에게도 생긴 겁니다. 제가 산 성경책은 크고 두꺼운 책이었습니다. 지금은 학교에 사물함이 있어 교과서를 학교 개인 사물함에 넣고 다니지만, 그 당시에는 없었기 때문에 분실의 위험이 있어서 대부분 책가방에 수업 교과서와 사전을 넣어 무겁게 가지고 다녔습니다. 두꺼운 저의 성경책 또한 수업시간에만 학교에 가지고 갔습니다.

어느 날 1학년 신학기에 학교에서 파란색 표지의 손바닥만한 성경책을 모든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한국 국제기드온협회에서 배부해 주신 신약전서와 시편, 잠언이 있는 성경책이었습니다. 저는 이 성경책이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매일 학교에 가지고 다녀도 무겁지 않고 무엇보다 가로로 써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매일 아침 예배를 드리고 교과수업을 시작합니다. 성경 수업시간을 통해서는 성경말씀을 배우고,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도 외우고, 찬송가도 배웠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궁금증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파란색 표지의 성경책을 매일 읽어 보기로 마음먹었고, 학교에 등교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책가방에서 성경책을 꺼내 말씀을 한 장 읽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성경책을 구입했을 때, 구약부터 읽다가 포기했었는데, 기드온협회의 성경책은 신약부터 있어서 초신자인 제게는 좀 더 쉽게 다가왔습니다.

 

매일 함께 동행하게 된 기드온성경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반복해서 통독해 나가면서, 어느 순간 저는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었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려웠던 말씀들도 목사님들의 설교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도 더욱 커져 갔습니다. 마태복음 633절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하나님께서는 이 말씀과 같이 제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때, 저의 삶에 필요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등 모든 필요를 시기적절하게 채워주셨습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43:1)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 저에게 주신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녀에게 사랑의 두드림을 계속 하시며, 하나님 자신을 가르쳐 알게 하셨습니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어서도 저는 매일 아침, 이 작은 성경책을 꺼내 한 장의 말씀과 함께 저의 하루 첫 시간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저의 삶을 인도하셨고, 저의 성품을 다듬어 가셨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19:103) 라는 말씀과 같이 말씀을 가까이 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은 꿀을 먹음 같이 저에겐 너무나 달콤하게 느껴졌습니다. 교회에서는 어릴 적 너무나 하고 싶었던 성가대도 하고, 교사도 하며, 저의 믿음의 지경을 점차 넓혀 갔습니다.

 

기도의 응답, 가족구원

교회에 다니시니 않으셨던 부모님은 제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그때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 라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사모가 된 딸의 면을 세워 주고자 교회 나가셨던 어머니께선 지금은 권사가 되어 매주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계십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도의 응답이 더뎌 지쳐갈 때, 아버지는 중보기도의 시간이 무르익은 올해 첫 예배출석을 하며 교회에 등록하셨습니다. 지금은 새신자 교육을 수료하시고, 세례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믿음이 없는 가정에서 하나님은 저를 택하여 자녀 삼으셨고, 믿음의 환경으로 저를 인도해 가셨으며, 말씀으로 먹이시고, 기르시며, 제 삶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만들어 가셨습니다.

한국 국제기드온협회에서 나누어 주신 성경이 영의 양식이 되고 빛이 되어 저를 성장시키고 이끌어 주었듯, 저와 같은 상황과 형편에 계신 많은 분들에게도 전해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모든 이가 주께 돌아오는 은혜가 임하길 소망합니다. 여러분들의 섬김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전주예은교회 김은주 사모

Posted by 한국국제기드온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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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한가위

사역 소개 2023. 9. 19. 13:46

 

샬롬, 한가위를 맞아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지난 여름 무더위가 어느새 지나고 한가위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경영하시는 생업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국제기드온협회는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전 세계 199개 국에서, 24만 여 명의 회원과 수많은 후원자께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드온사역을 위해 마음 다해 힘써주신 사랑과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온 가족과 이웃이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풍성한 연휴가 되기를 바라며, 늘 건강하고 주 안에서 행복하시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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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광교회 이혜원 사모

저는 충청남도 신도안, 계룡산 밑 아주 깊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5대 독자인 아버지는 무척 완고하고 무서운 유교적 배경을 가진 그야말로 가부장적인 분이셨습니다. 자손이 귀한 집안에 시집온 어머니는 5남매를 낳고 임신 중에 가족계획을 하려다 이혼의 위기에 처해 결국 9남매까지 낳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행히 6번째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집은 1년 내내 제사가 끊이지 않았으며, 저의 할머니는 10년 동안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놓고 빌어서 5대 독자인 아버지를 낳으셨다고 믿고 살았던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기도하던 일을 계속해야 아버지가 무탈하게 오래 산다며 어머니에게 그 일을 대물림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어릴 때부터 제사와 기도를 늘 보고 자랐습니다.

 

신도안은 신령하다는 계룡산이 있는 곳인데 그래서 정 도령을 기다리는 유사종교를 비롯한 미신과 우상숭배가 골짜기마다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1983년부터 신도안은 삼군사령부와 계룡부대가 들어오기 위한 대대적인 이주 정책이 시행되었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모두 이주해야 하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20리 길을 걸어 다녔던 신도국민학교 마지막 졸업생으로 신도안을 떠나게 되었고 대전과 논산 사이에 있는 연산면, 연산중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한 반에 60명의 학생이 9반까지 있는 남녀 공학 학교로 전체 학생 수가 1500명 정도 되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파란색 작은 성경책을 나눠주며 전도하시는 선생님을 만났고, 그 성경책이 제 인생의 첫 번째 성경책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선생님은 학교 모든 학생에게 성경책을 나눠주셨을 것입니다. 입학식 당일에도, 등교할 때에도, 그리고 수업시간에도, 수시로 복음을 전하며 성경책을 나눠주셨고, 나눠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말씀에 기록된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윤리,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40대 중반의 김정랑 선생님이셨는데, 기드온협회 회원이셨습니다. 뿔테 안경과 짧은 머리, 검은 양복이 인상 깊었던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교실에 들어오시면 잠시 기도하시고 수업을 진행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어 쫓은 일, 죽은 사람도 살리는 이야기 등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을 들려주셨고, 천국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간증들을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가끔, 노래도 가르쳐주셨는데 제가 처음 배운 노래가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내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되리였습니다.

저는 난생처음 예수님이란 분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신도안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인지 저는 전혀 복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마음이 쏙 빨려 들어갔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다 믿어야 하는 줄 알고 순수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처음에 선생님의 이런 모습을 접한 아이들은 어리둥절하며 웅성거렸고, 급기야 아이들의 볼멘소리와 불평도 커졌습니다. 엄청 긴장하며 수업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들키면 어떡하지?’ 불안한 건 오로지 학생들 몫이었습니다. 학교에 문제가 될까 봐 노심초사했습니다. 이래도 되나 싶어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이 늘 한결같았습니다. 반항하고 거절하는 눈빛으로 투덜대는 아이들도 있었고 교회 다니는 아이들조차 이게 맞나?” 하면서 반대의 의사를 표시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그때의 긴장했던 감정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수업 시간, 공부를 가르치실 때에는 중요한 핵심만 콕콕 찝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교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뿐만 아니라 대외 평가시험에서도 선생님 과목은 1위의 성적을 내었기에 학교에서도 어쩌지 못하는 거라고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제가 졸업할 때까지 선생님 때문에 학교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다. (5:12)

 

수업시간 외에 김정랑 선생님의 모습은 늘 혼자였고, 입에는 뭔가를 늘 중얼거리며 다니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말씀을 읊조리거나 기도하거나 찬양을 부르셨던 것 같습니다. 다른 선생님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고, 혼자 외롭게 지내는 이유를 학생들은 다 알아채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유머도 말재주도 인기도 없으셨고, 학생들에게 인간적으로 그렇게 매력적이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저 복음을 전하는 일이 당신의 일인 것처럼 그냥 성실하게 복음을 전하는 기독 교사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쳐준 노래를 자그마한 목소리로 아이들이 전부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선생님이 전도하는 것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뀌고 늘 혼자인 것 같았던 선생님은 점심시간에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성경을 읽으며 기도도 같이하고 10여 명이 넘는 아이들과 성경 공부도 하며 보내게 되었습니다. 주기적으로 금식도 하며 기도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하교 후에도 학생들은 집으로 곧바로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삼삼오오 모여서 학교 인근에 있던 교회에 들러서 마룻바닥에 무릎 꿇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잔잔한 영적 부흥이 학교를 감싸는 것 같았습니다. 누가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강제성도 없었지만, 선생님이 들려주신 간증과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듣고 나면 기도하러 저절로 발걸음이 옮겨졌던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도 그중에 한사람이 저였습니다.

 

저는 집안에서 예수 믿는 것에 대한 부모님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못 가니까 학교 끝나면 친구들하고 교회에 들러서 기도하고 집으로 가곤 했습니다. 성경책도 아버지한테 들켜서 몇 번이나 뺏기고, 찢겼는지 모릅니다. 그런 날은 옥상에 올라가서 하늘의 별을 보며 울었던 날이 생각납니다. 선명하고 정확하게 복음을 깨닫지 못했던 어린 믿음의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놓지 않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성경책을 여러 번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신약 1독을 한 성경책이 손바닥만 한 파란색 성경책이었습니다. 포켓 성경보다 글씨가 커서 읽기에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내용이 잘 이해가 안 돼도 도서관에서, 집에서 3독을 목표로 무조건 읽어나갔습니다. 그때 읽었던 성경 말씀을 지금은 뜻을 알고 생명의 양식으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그때 학교에서 예수님을 만난 학생들이 정확히 몇 명인지 알 수 없으나 많은 친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으로 기억하며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도 그때 저랑 같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친구와 얼마 전에도 통화하며 김정랑 선생님이 너무 고맙다고, 덕분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무엇보다 성경책을 가까이 하고 읽도록 해주신 것이 너무 감사하다고, 얼마나 많은 복음의 열매가 맺혀졌는지 우리가 일일이 다 찾아서 확인할 길은 없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이 땅 곳곳에서 살고 있을 거라고, 선생님처럼 복음의 씨를 뿌리고 있을 거라고, 선생님이 그때 너무 수고 많으셨다고, 감사하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실거라고.” 이런 대화를 하며 진작에 찾아뵙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을 못내 후회했습니다.

 

비가 오는 것과 바람 부는 것을 겁내지 않고 복음의 씨를 뿌리고,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안위보다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보다 세상의 법과 규율보다 더 지엄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선생님 덕분에, 학생들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고, 그 학생들도 다시 전도자의 삶으로 하나님께서 이끄셨다고 생각합니다.

씨를 뿌릴 때에 나지 아니할까 노심초사했을 선생님은 제자들을 떠나보내며 분명히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성도들을 말씀으로 부탁했던 것처럼 어린 제자들을 말씀에 맡겼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중학교 때 파란 성경책을 받으면서 40년 뒤에 제가 이 자리에서 서서 그 일에 대해 간증하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상상도 못 했을 일인데, 과거를 돌아보니 하나님의 섭리하신 길이 보이고, 복음을 전해 보니 그때의 선생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최근에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한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전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시더니 네가 중학교 때 그렇게 성경책을 들여다볼 때, 나는 그때부터 네가 예수 믿는 집으로 갈 줄 알았다.” 그러십니다. 어머니 말씀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맞아! 그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내 길을 정하셨구나.’

나의 모든 걸음을 훤히 들여다보시는 하나님! 루스드라에서 디모데가 바울을 만나 그의 인생의 방향이 바뀐 것처럼, 나도 중학교 때 선생님을 만나 내 인생의 길이 바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신적 만남인 것 같습니다. “만왕의 왕께서는 종들의 앞길을 준비하기 위해 앞서가신다. 합당한 때 합당한 장소에 우리를 전략적으로 배치하신다라는 글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신도안에서 이주시켜 나를 연산중학교로 옮기시고 전략적으로 배치하신 하나님! 깊은 곳에 살던 나를 아시고, 우상에게 제사와 기도를 하던 집안에서 불러내어 참 신이신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삶으로, 우리 집에 믿음의 그루터기로 삼아주신 하나님! 중학교 2학년 때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 사실을 알고도 미루다가 할머니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경험으로 인해 복음을 전하지 않은 불순종이 한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된다는 걸 마음 깊이 새겨주신 하나님! 다시는 이런 일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절박함이, 저로 하여금 가족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게 합니다.

저의 고모님도 임종 전에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고, 알지도 못하는 대상에게 기도하시던 어머니에게도 복음을 전할 때를 주셔서 작은 믿음이지만 지금은 요양병원에서 제가 만들어 드린 기도 책자를 하루에 몇 번이나 읽으며 가족 복음화를 위한 기도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저에게 남은 시간을 선생님이 보여주신 교훈을 따라 영혼구원의 일을 위해 더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나의 평생에 가장 복된 일은 내가 예수님을 만난 것이라. 나의 평생에 가장 잘한 일은 내가 예수님을 주로 섬긴 것이라. 나는 주를 섬기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내가 걸어온 모든 시간 다 주의 은혜니 내가 걸어갈 모든 날도 주만 섬기며 살리. 오직 예수 이름 부르며 살아 가리라.” 이 찬양의 가사가 저의 마음을 너무나 잘 대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혜광교회 이혜원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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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에서 사명으로

간증 2023. 8. 1. 14:47

저는 기드온협회 이은욱 회원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대전에서 보문고등학교 재학 중에 한동네에 사시는 대전제일장로교회 여 집사님의 인도로 처음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 발단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나의 삶이 소극적이고 위축되어 낯선 사람에게는 부끄러워 말을 건네지도 못하는 열등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전제일장로교회 고등부 수련회에서 고등부를 지도하시던 전도사님의 말씀에 깨어져 눈물로 회개하는 순간 뜨거운 가슴을 체험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침울하게만 보였던 창조세계가 그렇게 밝고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가벼운 깃털이 바람에 날리듯 확 트인 창공을 훨훨 날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인생관이 바뀌어 부정적인 사고가 긍정으로, 소극적인 사람이 적극적인 사람으로, 자괴감이 자신감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이렇게 변화된 사람으로 바꾸어 주셨다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바로 진학하지 못할 형편이어서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때에 하나님께서는 시골 마을에 교회를 개척하는 열정을 주셨습니다, 교회 개척이 시작되자 여름에는 저녁시간에 마당에 멍석을 펴 놓고 예배를 드리고 겨울엔 사랑방에서 모이기 시작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뒷동산 자락에 예배당을 세우고 예배시간엔 산소통을 달아놓고 종을 쳤습니다. 그 당시에는 시계가 희귀하던 때라 예배시간을 종을 쳐서 알려야만 했습니다. 남녀노소 2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명절 때면 집 뒤 고목나무 밑에 냉수 한 그릇을 떠다 놓고 소제를 올리며 우상을 섬기던 누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 후 저는 건설현장 막노동판에서 일 년 동안 일하며 대학등록금을 마련하여 신학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일꾼이 되려면 신학 공부를 하여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 년 후 군에 입대하게 되어서 군 복무를 마치고 나서 불가피하게 고학으로 등록금을 조달하여야 했기 때문에 야간대학으로 편입학하여 본 대학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거처 중년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중 세월이 흘러 천안장로교회에서 2007년도에 시무장로 은퇴를 맞게 되었습니다. 시원섭섭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동안 맡았던 교회사역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는 점에서는 시원했지만, 이제 늙었으니 교회 사역에서 물러난다는 점에서는 섭섭했습니다. 인생 후반 여정에서 나의 갈 길을 확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때부터 일주일 동안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일주일 후에 받은 응답은 너희는 온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저에게 전도하는 것이 내가 제일 기뻐하는 것이란다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 후 교회에서 전도폭발훈련을 받고 전도팀의 일원이 되어 매주 토요일마다 태조산 등산로 전도에 참여했습니다.

 

그때 마침 기드온협회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는 회원의 인도로 20122월 기드온협회에 입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대외적으로 전도 활동을 할 수 있는 단체를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협회를 붙여 주신 것입니다. 협회에서 매주 모이는 주간기도회에 참석하면서 중병 중에 있는 저의 아내 병 낫기를 위해 중보기도 요청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회원들이 합심으로 열심히 기도해 주셨습니다. 2주 차 되었을 무렵 기도회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중병으로 누워만 있던 아내가 일어나서 주방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이로운 표정으로 웬일이야?”라고 물었더니 몸이 많이 좋아져서 일어났어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기드온협회 주간기도회 중보기도가 이렇게 빨리 응답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내가 지은 따듯하고 맛있는 밥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가 죽었던 나를 살렸듯이 아내의 병 고침의 은혜가 나를 또 한 번 감동케 하시니 기드온협회 사역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2012년 서천안캠프 입회 후 일 년이 지날 무렵 연차총회에서 총무로 지명되어 3년간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회장을 맡겨 주셨습니다. 저는 모든 기드온 모임이나 행사에서 빠져 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주님이 부르셔서 맡겨 주신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회장 역임 2년 후에 서부지역대회에서 3지구이사 직무를 맡겨 주셔서 3년 동안 섬겼습니다. 그 후 신앙기금이사로 3년을 계속 섬겨 오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요한계시록2:10) 처음 총무직을 임명받았을 때 받은 성경구절입니다. 죽도록 충성할 이유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저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 말씀도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 내에서나 대외적으로 기드온 사역에서 주님이 맡겨 주신 복음사역을 우선순위에 놓고 사역을 합니다.

이렇게 복음 전도사역에 열중하고 있던 중 아내가 고관절 골절상을 입고 대학병원에 입원 수술 후 요양병원 입원 2년 만에 저의 곁을 영원히 떠나고 말았습니다. 노년기에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저에게 닥친 비통한 아픔이 눈물로만은 해결이 안 되었습니다. 쓸쓸이 홀로 남은 노년에 앞날을 생각할 때에 이때까지 맛보지 못했던 고독과 절망이 엄습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현상에 외로움만 보였습니다. 입맛도 잃고 살 의욕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몇 주가 지나는 동안 딸아이가 와서 같이 지내며 아버지의 마음을 추슬러 주었습니다. 먹지를 않으니 반찬을 맛있게 만들어 먹여주고, 주방 일과 청소까지 엄마가 하던 일을 1주 정도 매일 같이 와서 거들고 대화의 상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동시에 기드온 형제들의 따뜻한 위로와 기도가 잠시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되찾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 잃은 슬픔과 고독을 빠른 시일 안에 떨쳐 버리게 해 주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기드온사역과 교회 전도사역에 전념하게 하여주옵소서.’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가브리엘 성가대 대원과 다락방 순장, 전도팀원으로 봉사의 장을 넓혀 주셨습니다. 또한 기드온사역도 힘을 낼 수가 있었습니다. 2개월이라는 빠른 시일이 지날 무렵 본연의 정상적인 생활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노년기에 아내를 잃고 2년 안에 뒤따라가는 분들에 비하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주님의 많은 축복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자녀의 축복, 안정된 삶의 축복, 건강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건강의 축복이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물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특히 노년기에 건강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건강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열심히 움직이다 보면 자연히 건강해진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나는 힘들어도 열심히 움직입니다. 움직임이 적을 때는 하루에 7천 보 이상 걷기도 합니다.

늙었다고 주저앉아 있으면 빨리 쇠퇴해져서 건강을 잃게 됩니다.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기드온사역을 위해 열심히 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쓰시기 위해 부르셔서 건강과 복음 전도자의 사명 곧 기드온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명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 하다 보면 노년기에 주님이 지켜주시는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부르실 때에 기쁨으로 주님 앞에 설 것을 확신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마태복음25:21)라고 말씀하시면서 팔을 넓게 벌려 그 따뜻한 가슴에 저를 안아주시리라 믿습니다. 그 하나님의 인자한 모습을 소망하며 기쁨으로 기드온의 사명을 감당하려 합니다.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할렐루야

 

이은욱 기드온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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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불신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생 시절에 친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지금은 전주 완산교회를 섬기는 유병근 목사입니다.

저는 1981 5 6일 더운 여름, 군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믿음의 형제들이 저를 단순한 국방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군에 입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유병근 형제를 군에 작은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임을 상기하면서 하나의 귀중한 선물을 저에게 주었는데, 그 선물은 다름 아닌 기드온협회에서 나누어주는 작은 포켓 성경이었습니다. 그 성경책은 저에게 너무 소중했습니다. 훈련소에 입소하자마자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지품은 다 빼앗겼지만 기드온협회에서 나누어준 작은 성경은 다시 돌려받았습니다. 그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힘겨운 6주의 훈련을 받기 시작했는데, 훈련의 일과는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훈련이었고, 종종 야간 훈련도 받았습니다. 더운 여름에 태양 빛이 내리쬐는 연병장에서의 훈련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50분을 훈련하면 반드시 10분을 쉬게 해주었습니다.  10분이 저에게는 생명의 떡과 영적 생수를 마시는 시간이었습니다. 상위 오른쪽 포켓에 있는 작은 성경을 꺼내어 읽음으로 영적 힘을 공급받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3: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8: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오.”( 27:1) 등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은 저에게 믿음의 용기를 주시고, 담대함을 주셨고, 그 힘으로 훈련의 고통을 이길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내가 보냄 받은 선교사라는 정체성을 확고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훈련받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내무반을 통솔하는 향도로 저를 뽑아 주셔서 함께 훈련받는 전우를 섬기는 기회를 주셨는데, 일과가 다 끝나고 취침하면 그때 마지막으로 제가 통일화를 벗고 부르튼 발을 물로 닦은 후 잠을 청하는데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기를 사랑하는 종아 어떻게 바로 잠을 잘 수 있느냐?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자야지 그래서 모포를 뒤집어쓰고 30분 동안 전우들을 위하여, 그들의 영혼이 주님을 만나도록, 그리고 나를 파송한 형제들의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친구가 말하기를 나도 교회에 다니는데, 자네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 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훈련이 2주 진행된 후 처음으로 매점에 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얼마나 먹고 싶은 것이 많았는지요? 친구들이 이것저것을 막 사 먹으려고 할 때, “우리 조금만 시간을 내서 말씀을 읽은 다음에 먹자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그 성경을 꺼내서 시편의 말씀을 읽고, 친구들과 손을 잡고 잠깐 기도한 다음에 빵과 음료를 먹었습니다.

훈련이 끝나고 자대 배치를 받게 되었는데, 저는 그 당시 전투 경찰 기동대에 배치되었고 영내에 교회가 없는 상태로 첫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맨 졸병이 어떻게 영외의 교회로 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교회 가기 위한 외출이 허용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주일이 되어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영외 예배당에 나갈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때 성령님께서 부대의 식당에서 예배드리면 되지 않느냐?”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조심조심 동료와 선임 중에서 과거에 교회를 다닌 분이나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부대 식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도 역시 기드온협회에서 제공한 성경을 펴서 말씀을 전하면서 영적인 교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세상에 보냄 받은 작은 선교사라는 정체성을 갖게 하고, 내 삶 존재의 목적이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며, 지금,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섬기는 삶을 살게 한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기드온협회에서 준 작은 포켓 성경이었습니다. 그 성경의 말씀은 저에게 생명이고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4:12)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기드온의 그 작은 성경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고,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셨던 바로 그 길을 걷게 하였습니다. 놀라운 인생의 여정으로 인도한 한 권의 책을 전해주신 기드온협회의 사역에 감사를 전합니다.

완산교회 유병근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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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서울 북아현동 북성국민학교를 다니던 때는 지금처럼 좋은 품질의 학용품과 풍성하고 맛있는 먹거리가 많지 않던 빈곤하고 배고픈 시절이었고, 그나마 간식거리 등을 유일하게 얻어먹을 수 있던 곳이 교회였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서 간식이나 시상품을 받고나서는 한동안 교회와는 담을 쌓습니다. 그러다가 성탄절이 가까이 오면 친구들이 교회에 가자고 합니다. 교회에 가면 먹을 것을 주기에 체면 불구하고 절기 때만 교회에 나가는 생활을 수년간 반복하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친구 따라, 절기 따라 저희 가정 식구 중에 혼자만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렇게 절기신자로 교회에 다니면서도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외우라는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을 지난 달력 뒷면에 써서 벽에 붙여놓고 열심히 읽고 외웠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경책이 흔하지 않은 때라 부모들이 교회를 다녀도 성경책을 갖고 있는 아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고, 대부분 빈손으로 교회에 왔습니다. 저는 절기신자로 주일학교 다니면서도 성경책이 너무나도 갖고 싶었습니다. 빡빡머리 중학생이 된 저는 체면 때문에 더 이상 절기에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고, 교회를 완전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충암중학교 1학년 때, 역사 선생님이 미국 이민을 가시면서 전교 학생들에게 선물을 주셨는데, 그 선물은 그토록 갖고 싶었던 성경책이었습니다. 기드온협회에서 발간한 빨간색 표지의 기드온성경이었습니다. 기드온성경을 받는 그 순간, 갑자기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습니다.(24:32) 성령님의 역사하심이었습니다. 기드온성경을 받은 그 주중에 안재찬이라는 친구가 명섭아! 우리교회에 갈래?”라고 하는데, 친구의 소리가 주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성결교회의 모교회인 무교동에 있는 중앙성결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뒤돌아보면 1970년대는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 시기에 한국교회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던 빌리그래함 집회(1973), 엑스폴로 74(1974), 77민족복음화대성회(1977) 등 대형집회에 직접 참석함으로 개인적인 신앙의 성장과 성숙의 기회와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아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드온성경 한권이 제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과 동생들도 전도하여 온 가족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습니다.(16:31) 모든 것이
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1:5),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음을 믿습니다.

1980년 전도사가 되어 중앙성결교회 어린이부와 학생회를 섬길 때에도, 1986년 개척하였던 은혜성결교회에서도, 저의 어린 시절의 성경 신앙 경험을 바탕삼아, 주일학교에서의 말씀교육이 평생 신앙을 좌우하는 시작점인 것을 알아 성경을 늘 우선순위로 두었습니다. 현재 시무하고 있는 보배성결교회에 30년 전 부임해서도 청년들에게 말씀만 가르쳤습니다. 매주 성경 공부를 두 시간 이상을 하였는데, 이것이 원동력이 되어 말씀의 능력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어 말씀대로 순종하고, 헌신한 청년들이 좋은 일꾼들이 되어 시무장로와 여러 직분들을 맡아 충성스럽게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최근에 주일학교가 부흥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오락적인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선물공세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신앙 교육을 하고 아이들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갖는 것이 비결입니다. 한국교회가 다음세대를 키우는데 정말 필요한 것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늘 가까이 하여 읽게 하고, 부지런히 가르쳐(6:7)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라 믿습니다.(딤후3:15~17)

 

마지막으로 한국 국제기드온협회의 사역에 깊은 감사와 고마움을 표하고, 중학교 시절 기드온 성경책을 나눠주고 미국에 가신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기드온협회의 성경배부사역이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복음화가 이루어지는 때를 기대하며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저를 변화시킨 기드온 성경을 53년이 지난 지금도 보물같이 간직하고 있으며, 자손들에게 가보로 물려주려고 합니다. 할렐루야!

보배성결교회 이명섭 목사

Posted by 한국국제기드온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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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협회 창립 60주년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한국 국제기드온협회는 1963년 창립 이후, 국내 약 6천만 권의 성경을 각계각층의 수많은 남녀노소에게 배부하여 이 세상 모든 이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매진해 왔습니다.

 

2023, 한국 국제기드온협회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지나온 60주년을 감사하며, 앞으로 100년을 향하여 국내를 넘어 전 세계 복음화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드온사역에 동참해 주신 한국 교회와 후원자 그리고 전국의 모든 회원에게 감사드리며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Posted by 한국국제기드온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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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극동방송 김성현 지사장

할렐루야! 안녕하십니까. 영동극동방송 지사장 김성현입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알고 만나게 된 기드온에 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기드온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대학교 4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어느 곳 로비 테이블 위에 파란색 표지의 손바닥만 한 책들이 여러 권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이 뭔가 봤더니 성경책이었습니다. 표지에는 신약성경, 시편과 잠언이라는 타이틀이 새겨져 있었고 아래쪽에는 국제기드온협회 로고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성경책은 검은색 표지에 안쪽은 붉은색이 칠해져 있었고 위에서 아래로 읽는 성경에다가 부피가 큰 성경이 대부분이었는데 기드온 성경은 휴대하기가 편해 그때부터 그 성경책을 가지고 학교를 다니면서 틈틈이 읽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는 믿음도 많이 부족했기에 대학 캠퍼스 안에서 큰 성경책을 펼쳐 놓고 읽는 것이 조금은 부담이 됐었는데 기드온 성경은 크기가 작아 주위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제 신앙도 점점 더 자라게 되지 않았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제가 기드온협회에서 배부한 성경책의 고마움을 크게 느끼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학교를 졸업하고 베드로 사도의 후예가 되고 싶어서 해군 학사장교로 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진해에 있는 해군 교육사령부로 입소를 할 때 대학생 때 읽던 그 기드온 성경을 갖고 들어갔습니다.

다들 경험하셨겠지만 군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사회에 있을 때 입었던 의복과 소지하던 개인 물품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저도 개인 소지품을 담당 교관님에게 모두 제출했는데 그 교관님이 소지품 가운데 기드온 성경을 처음에는 제출받았다가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다시 제게 돌려주셨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때 그 교관님의 마음을 움직여주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4개월의 해군 훈련소 기간 동안 민간인에서 군인으로 신분이 바뀌면서 계속되는 훈련으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힘든 면도 있었지만 매일 점호를 마친 후 취침하기 전에 잠깐 틈을 내 기드온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제게 많은 위로와 힘을 주셨습니다.

제가 겨울에 해군에 입대를 했는데 성탄절에 교회에 갈 수 없는 상황이 갑자기 생겨 크리스천 동기생들과 그 기드온 성경을 서로 돌려가며 읽었던 기억도 납니다.

장교 훈련을 마치고 3년의 해군 생활 중 2년을 바다 위 군함에서 근무했습니다. 모든 군인이 그렇겠지만 해군 군함에서의 생활도 녹록지가 않았습니다. 아무리 큰 배라 하더라도 바다에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면 그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큰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배에 있다가도 풍랑을 만나니까 예수님을 그렇게 간절히 찾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역시 제자들처럼 심한 뱃멀미를 겪었고 동, , 남해를 항해하면서 북한 군함과의 대치 상황이라든지 중국 어선 퇴거라든지 군 작전을 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도 마주치게 됐습니다. 해군은 배가 항해하든 또는 항구에 정박하든 승조원들이 계속 당직근무를 하게 돼 정신적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데 그때도 역시 제 군복 안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파란색의 작은 기드온 성경책이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지금 군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보면서 주님께서는 그때그때마다 말씀으로 저와 함께 해주셨던 것입니다.

 

해군에서 전역하고 극동방송에 입사하고 나서 기드온협회가 전 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국제 선교 기관임을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제 젊은 시절, 특히 군 복무 시절, 제게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작은 성경책을 통해 알려주시고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기드온 회원님들께 다시금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세상 가운데서는 그렇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빛과 소금처럼 오늘도 묵묵히 성경 배부를 통해서 그리고 개인 전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계시는 기드온협회와 회원님들을 위해 저는 방송사 직원들과 함께 더 열심히 응원하며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한국국제기드온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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