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광교회 이혜원 사모

저는 충청남도 신도안, 계룡산 밑 아주 깊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5대 독자인 아버지는 무척 완고하고 무서운 유교적 배경을 가진 그야말로 가부장적인 분이셨습니다. 자손이 귀한 집안에 시집온 어머니는 5남매를 낳고 임신 중에 가족계획을 하려다 이혼의 위기에 처해 결국 9남매까지 낳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행히 6번째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집은 1년 내내 제사가 끊이지 않았으며, 저의 할머니는 10년 동안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놓고 빌어서 5대 독자인 아버지를 낳으셨다고 믿고 살았던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기도하던 일을 계속해야 아버지가 무탈하게 오래 산다며 어머니에게 그 일을 대물림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어릴 때부터 제사와 기도를 늘 보고 자랐습니다.

 

신도안은 신령하다는 계룡산이 있는 곳인데 그래서 정 도령을 기다리는 유사종교를 비롯한 미신과 우상숭배가 골짜기마다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1983년부터 신도안은 삼군사령부와 계룡부대가 들어오기 위한 대대적인 이주 정책이 시행되었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모두 이주해야 하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20리 길을 걸어 다녔던 신도국민학교 마지막 졸업생으로 신도안을 떠나게 되었고 대전과 논산 사이에 있는 연산면, 연산중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한 반에 60명의 학생이 9반까지 있는 남녀 공학 학교로 전체 학생 수가 1500명 정도 되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파란색 작은 성경책을 나눠주며 전도하시는 선생님을 만났고, 그 성경책이 제 인생의 첫 번째 성경책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선생님은 학교 모든 학생에게 성경책을 나눠주셨을 것입니다. 입학식 당일에도, 등교할 때에도, 그리고 수업시간에도, 수시로 복음을 전하며 성경책을 나눠주셨고, 나눠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말씀에 기록된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윤리,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40대 중반의 김정랑 선생님이셨는데, 기드온협회 회원이셨습니다. 뿔테 안경과 짧은 머리, 검은 양복이 인상 깊었던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교실에 들어오시면 잠시 기도하시고 수업을 진행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어 쫓은 일, 죽은 사람도 살리는 이야기 등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을 들려주셨고, 천국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간증들을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가끔, 노래도 가르쳐주셨는데 제가 처음 배운 노래가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내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되리였습니다.

저는 난생처음 예수님이란 분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신도안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인지 저는 전혀 복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마음이 쏙 빨려 들어갔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다 믿어야 하는 줄 알고 순수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처음에 선생님의 이런 모습을 접한 아이들은 어리둥절하며 웅성거렸고, 급기야 아이들의 볼멘소리와 불평도 커졌습니다. 엄청 긴장하며 수업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들키면 어떡하지?’ 불안한 건 오로지 학생들 몫이었습니다. 학교에 문제가 될까 봐 노심초사했습니다. 이래도 되나 싶어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이 늘 한결같았습니다. 반항하고 거절하는 눈빛으로 투덜대는 아이들도 있었고 교회 다니는 아이들조차 이게 맞나?” 하면서 반대의 의사를 표시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그때의 긴장했던 감정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수업 시간, 공부를 가르치실 때에는 중요한 핵심만 콕콕 찝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교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뿐만 아니라 대외 평가시험에서도 선생님 과목은 1위의 성적을 내었기에 학교에서도 어쩌지 못하는 거라고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제가 졸업할 때까지 선생님 때문에 학교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다. (5:12)

 

수업시간 외에 김정랑 선생님의 모습은 늘 혼자였고, 입에는 뭔가를 늘 중얼거리며 다니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말씀을 읊조리거나 기도하거나 찬양을 부르셨던 것 같습니다. 다른 선생님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고, 혼자 외롭게 지내는 이유를 학생들은 다 알아채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유머도 말재주도 인기도 없으셨고, 학생들에게 인간적으로 그렇게 매력적이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저 복음을 전하는 일이 당신의 일인 것처럼 그냥 성실하게 복음을 전하는 기독 교사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쳐준 노래를 자그마한 목소리로 아이들이 전부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선생님이 전도하는 것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뀌고 늘 혼자인 것 같았던 선생님은 점심시간에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성경을 읽으며 기도도 같이하고 10여 명이 넘는 아이들과 성경 공부도 하며 보내게 되었습니다. 주기적으로 금식도 하며 기도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하교 후에도 학생들은 집으로 곧바로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삼삼오오 모여서 학교 인근에 있던 교회에 들러서 마룻바닥에 무릎 꿇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잔잔한 영적 부흥이 학교를 감싸는 것 같았습니다. 누가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강제성도 없었지만, 선생님이 들려주신 간증과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듣고 나면 기도하러 저절로 발걸음이 옮겨졌던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도 그중에 한사람이 저였습니다.

 

저는 집안에서 예수 믿는 것에 대한 부모님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못 가니까 학교 끝나면 친구들하고 교회에 들러서 기도하고 집으로 가곤 했습니다. 성경책도 아버지한테 들켜서 몇 번이나 뺏기고, 찢겼는지 모릅니다. 그런 날은 옥상에 올라가서 하늘의 별을 보며 울었던 날이 생각납니다. 선명하고 정확하게 복음을 깨닫지 못했던 어린 믿음의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놓지 않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성경책을 여러 번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신약 1독을 한 성경책이 손바닥만 한 파란색 성경책이었습니다. 포켓 성경보다 글씨가 커서 읽기에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내용이 잘 이해가 안 돼도 도서관에서, 집에서 3독을 목표로 무조건 읽어나갔습니다. 그때 읽었던 성경 말씀을 지금은 뜻을 알고 생명의 양식으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그때 학교에서 예수님을 만난 학생들이 정확히 몇 명인지 알 수 없으나 많은 친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으로 기억하며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도 그때 저랑 같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친구와 얼마 전에도 통화하며 김정랑 선생님이 너무 고맙다고, 덕분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무엇보다 성경책을 가까이 하고 읽도록 해주신 것이 너무 감사하다고, 얼마나 많은 복음의 열매가 맺혀졌는지 우리가 일일이 다 찾아서 확인할 길은 없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이 땅 곳곳에서 살고 있을 거라고, 선생님처럼 복음의 씨를 뿌리고 있을 거라고, 선생님이 그때 너무 수고 많으셨다고, 감사하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실거라고.” 이런 대화를 하며 진작에 찾아뵙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을 못내 후회했습니다.

 

비가 오는 것과 바람 부는 것을 겁내지 않고 복음의 씨를 뿌리고,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안위보다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보다 세상의 법과 규율보다 더 지엄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선생님 덕분에, 학생들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고, 그 학생들도 다시 전도자의 삶으로 하나님께서 이끄셨다고 생각합니다.

씨를 뿌릴 때에 나지 아니할까 노심초사했을 선생님은 제자들을 떠나보내며 분명히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성도들을 말씀으로 부탁했던 것처럼 어린 제자들을 말씀에 맡겼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중학교 때 파란 성경책을 받으면서 40년 뒤에 제가 이 자리에서 서서 그 일에 대해 간증하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상상도 못 했을 일인데, 과거를 돌아보니 하나님의 섭리하신 길이 보이고, 복음을 전해 보니 그때의 선생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최근에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한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전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시더니 네가 중학교 때 그렇게 성경책을 들여다볼 때, 나는 그때부터 네가 예수 믿는 집으로 갈 줄 알았다.” 그러십니다. 어머니 말씀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맞아! 그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내 길을 정하셨구나.’

나의 모든 걸음을 훤히 들여다보시는 하나님! 루스드라에서 디모데가 바울을 만나 그의 인생의 방향이 바뀐 것처럼, 나도 중학교 때 선생님을 만나 내 인생의 길이 바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신적 만남인 것 같습니다. “만왕의 왕께서는 종들의 앞길을 준비하기 위해 앞서가신다. 합당한 때 합당한 장소에 우리를 전략적으로 배치하신다라는 글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신도안에서 이주시켜 나를 연산중학교로 옮기시고 전략적으로 배치하신 하나님! 깊은 곳에 살던 나를 아시고, 우상에게 제사와 기도를 하던 집안에서 불러내어 참 신이신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삶으로, 우리 집에 믿음의 그루터기로 삼아주신 하나님! 중학교 2학년 때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 사실을 알고도 미루다가 할머니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경험으로 인해 복음을 전하지 않은 불순종이 한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된다는 걸 마음 깊이 새겨주신 하나님! 다시는 이런 일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절박함이, 저로 하여금 가족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게 합니다.

저의 고모님도 임종 전에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고, 알지도 못하는 대상에게 기도하시던 어머니에게도 복음을 전할 때를 주셔서 작은 믿음이지만 지금은 요양병원에서 제가 만들어 드린 기도 책자를 하루에 몇 번이나 읽으며 가족 복음화를 위한 기도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저에게 남은 시간을 선생님이 보여주신 교훈을 따라 영혼구원의 일을 위해 더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나의 평생에 가장 복된 일은 내가 예수님을 만난 것이라. 나의 평생에 가장 잘한 일은 내가 예수님을 주로 섬긴 것이라. 나는 주를 섬기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내가 걸어온 모든 시간 다 주의 은혜니 내가 걸어갈 모든 날도 주만 섬기며 살리. 오직 예수 이름 부르며 살아 가리라.” 이 찬양의 가사가 저의 마음을 너무나 잘 대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혜광교회 이혜원 사모

Posted by 한국국제기드온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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