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존경하는 장로님이 저를 추천하셨고, 그분의 인품을 보고 기드온에 가입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입하고 보니, 기드온이 다른 단체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처음 월례회에 참석했는데, ‘분’ 단위로 시간표가 있고 군더더기 없는 진행에 충격을 받으면서, ‘아, 기드온은 뭔가 다르구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 주, 두 주 주간기도회에 참석을 하던 중, 모인 분들이 헌금을 하는데 일반적인 헌금이 아니라 기념성서헌금이라는 것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가만히 선배들을 관찰했습니다. 결혼, 손자 입학, 졸업 기념 등 저도 덩달아 ‘생일 됐으니까 생일을 기념해서 성서헌금을 해야 하나 보다’ 생각하며 처음으로 시작해서 생각나는 감사를 실천하면서 헌금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사소한 것에 감사헌금 하는 것이 쑥스럽다 싶었는데, 그 쑥스러움도 조만간 없어졌습니다.
기념성서헌금의 순기능
부산캠프는 기념성서헌금을 드린 내용을 가지고 기도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순서에 따라서 각자 맡은 기도를 하고, 기념성서헌금에 대한 내용으로 드린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기도 내용이 아주 간절합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 헌금 드린 분의 상황을 알 수 있고, ‘아, 이런 좋은 일이 있었구나!’ 또는 ‘어려운 일을 겪으셨는데 그것조차 감사로 여기고 기도하시는구나! 등’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 정도로 간절한 기도를 올립니다. 그리고 기도회 후, 식사 교제 시간에 그것이 대화로 연결이 됩니다. “아, 그러셨어요. 축하드립니다.” 축하의 말로 또는 “참, 애쓰셨습니다.”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로 교제합니다. 기념성서헌금의 순기능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어떻게 하면 기념을 할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경 제작에 쓰이는 기념성서헌금
참 신기합니다. 기념성서헌금을 드리다 보니 계속 기념할 일이 생깁니다. 기드온에 들어왔기 때문에 알게 된 참 단순한 사실입니다만, 하나님께 드린 성서헌금으로 성경을 제작하여, 그 성경이 불신자에게 전달되는 이 원리가 교회에서 드리는 감사헌금과는 또 다른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기드온만큼 기념성서헌금의 목적이 확실하고 투명하고 본질에 집중하는 곳이 드물다는 생각이 들다 보니, 기념할 수 있다면 기념헌금을 드립니다. 그 드린 헌금이 기드온성경으로 변화되고, 그 성경이 어느 누군가의 손에 전달이 되면, 제2의 프랭클린 그레함 목사님 같은 간증자들이 생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기념성서헌금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 기대됩니다.
저는 인도의 전통적인 힌두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진학할 고등학교를 정해야 했는데, 아버지께서 힌두교 기숙학교를 보내기 위해 찾아보셨지만, 갈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기독교 기숙학교를 가야만 했는데, 아버지께서 “거기를 가더라도 성경을 절대로 읽지 말고, 기독교에 대해서 아예 생각하지도 말아라. 그냥 공부만 해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다행히 학교에 입학해서 힌두교를 믿는 선생님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도 저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 분이셨기에, 아침저녁으로 힌두 신에게 예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여름방학이 되었습니다. 저는 집으로 갔고, 선생님은 개인 사정으로 학교에 남아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변화
방학 동안 기드온협회에서 학교를 방문했고, 기드온회원들이 기드온성경을 나눠주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방을 쓰는 선생님에게도 기드온성경을 전해주면서 복음을 소개해 주었고, 선생님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제가 학교로 돌아와 제 방에 들어섰을 때, 선생님도, 벽에 붙어 있던 것들도 달라졌습니다. 선생님의 얼굴을 봤더니, 아주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라고 묻자, 선생님께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어!”라고 말씀해 주셨고, 저는 “안돼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다시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했습니까?” 물었더니, 선생님은 기드온성경을 들면서 요한복음 3장 16절을 펼쳐 읽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선생님, 알겠어요. 이 작은 책에서 말하는 신을 믿게 되셨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실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읽어주셨던 부분이 계속 귓가에 맴도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잠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렇게 일요일 아침이 되었는데, 선생님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그리고는 교회에 가셨습니다.
예수는 어떻게 생겨먹은 신인가?
어느 일요일 선생님께서 제게 “첼리, 나와 교회 가지 안을래?”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격한 거부감을 드러냈습니다. “선생님 미치셨어요? 저는 교회 가지 않을 거에요!” 그리 반응했지만, 제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선생님이 모든 것을 버려 가면서 예수를 믿게 하였는가? 가족, 종교, 힌두의 신들... 그럼 한번 가서 확인해볼까? 예수는 어떻게 생겨먹었는가?’ 그래서 다시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같이 가요.” 그러자 선생님께서 즉시 “그래, 가자!” 하셔서, 같이 걸어서 1.6km가 떨어진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상상한 교회는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꾸며진 건물이었지만, 도착해보니 멋진 건물이라고 마땅히 할 것 없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교회에 들어섰을 때, 목사님이 저를 보시며, “오! 이 학생이 그동안 우리가 기도해오던 그 학생이군요!”라며 맞아주었습니다.
교회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교회 왼쪽 벽에 한 그림을 보았는데, 벌거벗은 남자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며 죽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예수님이 어떤 모습인지, 십자가가 어떤 형상인지 몰랐습니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저는 아주 슬펐지만, 놀랐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왜 저런 흉한 그림이 교회 벽에 걸려있는 건가요?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려 죽은 모습을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미소를 지으며, “첼리, 저 그림이 이 교회에 있는 유일한 그림이야. 그리고 예수님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너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셨어. 예수님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구원에 관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저는 “그동안 수많은 신과 여신들을 믿어 왔습니다. 그중에 어떤 신도 나를 위해서 죽은 신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신들에게 많은 헌신을 드렸지만, 어떤 것도 보상받지 못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결국 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교회에서 돌아오고 나서, 제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사실을 가족이 알게 됐을 때 가족들이 저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했기에 무서워 떨었습니다.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집을 떠나 성경대학으로
그다음 여름방학에 집에 돌아가야 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주신 기드온성경을 가지고 갔습니다. 저희 집안은 독실한 힌두교 집안이었습니다. 집에는 특별히 매일 아침저녁으로 힌두신들을 예배하기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도착하자마자 신에게 예배할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방에 들어서기 전, ‘오늘이 부모님께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고백해야 하는 날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예배 준비를 마쳤을 때, 저는 어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저는 저 방에 이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저 우상에게 더이상 예배드릴 수 없어요.” 저의 어머니께서는 제가 농담한다고 생각하셔서, 웃으며 다시 물으셨습니다. “지금 너 뭐라고 했니?” 저는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저 방에 들어갈 수 없어요. 저는 이제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에요. 저는 예수님을 영접했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종교에 대해 엄격하신 분이었기에, “내가 많은 벌을 받게 됐구나!” 한탄하시며 아주 화를 많이 내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집으로 돌아오셨을 때, 이 사실을 아시고는 저에게 “학교로 돌아가지 말고 집 밖 어디도 나가지 말아라. 기독교인이 되었으니, 집에만 있어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 빌었습니다. “성경도 안 읽고, 교회도 가지 않을 테니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마치게 해주세요.”라고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아버지께서 학교로 돌아가는 것은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부드럽고 단호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공부만 해라!”
저는 학교에 돌아와서 과정을 마칠 수 있었지만, 집에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집에서 650km 떨어진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 대학으로, 기독교인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결정하고 떠났습니다.
아버지가 모르는 사실 한 가지
석 달 뒤, 아버지께서 저의 대학으로 찾아오셔서 저에게 “너는 더이상 이 학교에 다닐 수 없다. 당장 짐 싸라! 기독교에 관련된 모든 것들은 버려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대학에 입학한 지 3개월 만에 슬픈 마음으로 짐을 싸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모르시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기드온성경은 작아서 어디든지 숨길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기드온성경 한 권을 옷들 사이에 숨겨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고향에는 교회도 없었고, 제겐 설교를 들을 수 있는 라디오도 없었습니다. 집에서의 생활은 감옥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는 제가 기독교에 대한 모든 것을 잊게 하려고, 독실한 힌두교 집안의 남자와 결혼시키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힌두신에게 예배하며, 제사 음식을 가지고 왔지만, 오히려 제가 금식기도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기드온성경을 침대 매트리스 속에 숨겨놓고 매일 밤마다 욕실로 들어가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던 사건에 대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그들이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을 때, 감옥의 문이 열렸고, 그들을 묶고 있던 사슬들이 끊어졌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이 사건이 우리 집에서도 일어날 것을 믿었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
독실한 힌두교 집안의 남자가 결혼을 위해서 결혼식 21일 전에 저희 집에 왔을 때, 부모님은 계속 독촉하셨고, 그 남자는 저희 집 근처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께서 저를 건져내실 것을 알았습니다. 21일 동안 아버지는 계속 저를 채근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께서 제 방에 들어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쁜 소식이 있다.” 저는 아버지께서 저를 독촉하시기 위해서 들어오셨다고 생각하고, “아버지 저를 내버려 두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아니다. 꼭 할 말이 있다. 너와 결혼하기로 한 청년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 이후로 저는 제가 다니던 대학으로 돌아와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후 43년 동안 2명의 아름다운 자녀들을 허락하셨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많은 실패를 경험했지만, 저에 대한 주님의 계획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이 간증을 통해서 모든 기드온회원, 세계 각국의 기드온협회를 격려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곳으로 인도하시든지,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 선 그날, 각 사람에게 이런 질문이 주어질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였느냐?” 분명히 기드온회원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인도에 중국에 러시아에 아프리카에 세계 곳곳에 기드온성경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렇게 답하실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다.” 하나님께서 기드온 회원과 부인회원들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1990년 5월 26일 제 아내와 함께 한국 국제기드온협회 회원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장로로 임직을 받은 1989년 다음 해인 1990년에 입회할 때 제 나이 만 45세, 제 아내는 30대의 아주 젊은 때였습니다.
그 당시 수원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저희 교회 선배 장로님의 입회 권유가 있었는데 갓 장로가 된 자가 거절할 수 없어 응락을 했습니다. 입회 이후 저는 사업 일로 바쁘다는 핑계로 주간기도회는 전혀 참석하지 않았고 월례회만 마지못해 참석하는 비활동 기드온 회원으로 지냈습니다.
수원캠프 성경창고 지킴이
그러던 중 어느 월례회 안건을 토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비교적 젊고 열성이 대단한 분이 성서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성경책 보관상의 문제점을 얘기했습니다. 수원 시내 유신고등학교 운동장, 한 모퉁이에 있는 콘테이너 박스에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기에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자동차로 운행하기도 힘들고 박스 안의 습기로 보관 중인 성경을 많이 버리게 되어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쉽지 않다는 얘기였습니다. 마침 용인 민속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 사업장에 버섯을 기르던 재배사 빈방이 있었습니다. 60cm간격의 층으로 5단 선반으로 된 구조이며 환기가 잘 되게 설계된 방이었습니다. 경청하고 있다가 제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빈방 구조를 설명하고 수원에서 좀 떨어져 있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성경 창고로 제공하겠다고 제안하였고 흔쾌히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때부터 몇 년 동안 제가 수원 지역 성경창고 지킴이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1998년 8월 20일 캠프총회에서 성경창고 지킴이가 성서부장을 맡는 것이 마땅하다 하여 그로부터 3회기 동안 성서부장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기드온사역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서부장을 얼떨결에 맡았는데 눈을 들어보니 주간기도회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간기도회에 안 나갈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이후 지금까지 주간기도회를 빠진 적이 거의 없습니다. 주간기도회 없이는 기드온사역이 시작될 수 없고 또 감당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저는 계속 아웃사이더로 머물다가 어느 날 떨어져 나가고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매년 초 헌금액을 약정하고 실천
이렇게 꾸준히 기드온사역에 임하고 있던 중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만나게 되어 캠프에서 교회순방사역이 제한을 많이 받게 되면서 사역이 많이 위축되는 것을 목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에게 한 가지 생각이 강하게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기드온협회 국제대표가 한 메시지 중 한국 기드온들은 자신의 지갑을 더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우리들의 지갑을 좀 더 크게 여는 실행을 촉구하였고,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전국교육위원으로 신앙기금 프로그램을 강의하면서 신앙기금 모금 활성화를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권면하지만 제 자신이 그동안 적극적으로 실행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주저하며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갈라디아서 6 : 2절 말씀과 고린도후서 8, 9장에서 사도 바울 연보를 하나의 주제로 다루는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우리들의 헌금은 그 목적이 분명하며 그 헌금이 남의 짐을 대신 져 주는 것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이루는 것이고 헌금 방법은 매 회기 초에 회기 동안 할 헌금 금액을 약정하고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특히 기념성서헌금은 우리가 기드온사역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은혜에 넘치는 감사함으로 헌금할 때 늘 찾아하는 헌금이며 기드온사역의 마중물이라 생각하고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후 제가 교육위원으로 교육에 임하는 태도에도 많은 변화가 온 것을 저 스스로 실감합니다. 이 또한 제가 만난 큰 사건이었고 이렇게 때를 따라 만난 여러 사건으로 말미암아 제가 아직 기드온사역의 일꾼으로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되었고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은혜대로 된 일임을 믿으며 감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