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 그때 우리나라는 가난했습니다. 장년 신자들은 성경을 소지했으나 주일 학생은 대부분 성경이 없었습니다. 저처럼 불신 가정의 어린이는 아예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교회로 예배드리러 가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로망()이었습니다.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장학생이 되고 싶어서 공립 학교를 포기하고 장학제도가 있는 기독교 사립 중학교로 진학했습니다. 매주 1회 전교생 예배와 한 시간 성경 과목 시간은 시골 농촌교회에서 자라난 제게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만난 것처럼 환상적이고 행복한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 손에 성경은 없었습니다. 성경을 들고 예배당으로 가는 소원을 품고 있던 저에게 이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기적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부산캠프회원들이 우리 학교를 찾아와 전교생 700여 명에게 성경을 선물하였습니다. 성경 갖기를 소망하였던 저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기뻐 어쩔 줄 몰랐습니다. 전교생 700여 명 중에서 저만큼 행복해 한 학생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날로부터 제 책가방 속에는 기드온성경과 영어 단어 책이 필수품이 됐습니다. 기드온성경 덕분에 성경은 저의 평생 친구가 되었으며, ‘No Bible, No Breakfast’(성경을 읽지 않고는 아침을 먹지 않는다), ‘어딜 가든지 성경을 지니고 다닌다라는 생활신조가 만들어졌습니다.

 

실제로 이 신조는 저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19777월 군종장교로 훈련을 받을 때 완전 군장으로 광주 무등산(1,187m)을 넘어 동복 유격장을 향해 강행군을 했습니다. 군복 주머니 속 모나미 볼펜조차 무겁게 느껴져서 내던져 버릴 만큼 무더위 속에서 참으로 힘든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군복 주머니 속에는 기드온성경이 어김없이 들어 있었습니다.

 

기드온성경이 너무 좋아 열심히 읽고 암송하다 보니 김해, 창원 지역 SFC(Student For Christ, 학생신앙운동) 대회에서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신학생 시절과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과 동료들로부터 성경 박사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어떤 학위나 명예보다 이 칭찬을 들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모교인 고려신학대학원에 초청받아 설교할 때도 저는 젊은 신학도들에게 성경 박사가 되시오!”라는 당부를 잊지 않습니다. 울산에서 담임 목회를 하는 아들에게도 이 한 가지를 강조합니다.

 

은퇴하고 지금도 매일의 철칙이요 취미요 즐거움성경 묵상입니다(119:103, 50). 기드온 회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앞으로 북한 땅 2,200만 동포들에게도 기드온성경을 전달하는 꿈을 가지시길 축복합니다!

 

김철봉 목사(사직동교회 원로)

Posted by 한국국제기드온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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